강화도
신명주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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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22:03
초등부 봄소풍은 김포 애기봉-- 강화도 전등사---광성보를 돌아 봅니다.
** 애기봉의 유래
서기1636년, 인조 14년에 청나라 태종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범해 온 병자호란 때의 일입니다.
호란이 일어나자 당시 평양감사는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애첩 "애기"라는 기생을 데리고 수도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지름길이였던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지금은 우리가 마음대로 갈수 없게된 바로 이 강 건너 개성직할시 판문군 조강리에 이르렀을 때, 감사는 아깝게도 뒤따라오던 청나라 오랑캐에게 붙잡혀 다시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이 구사일생으로 전방에 흐르는 강을 건너 이산 좌측에 위치한 조강리란 마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후 날마다 애기는 이 봉우리에 올라와 님계신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로서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끝내 님이 돌아오지않자, 애기는 결국 병이들어 죽어가면서, 고향하늘과 님계신 북녘땅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묻어 달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기고 숨지자, 그 유언을 전해들은 조강리 마을사람들은 감사에 대한 일편단심과 애달픈 사랑을 가엷이 여겨, 애기를 이 봉우리에 묻어줌으로서 애기의 평생 한을 달래 주었던 것입니다.
*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 이 밖에 많은 유물이 있습니다. 다같이 즐겁게 떠나요.